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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4. <부정공>승지공휘석부전(承旨公諱碩溥傳)
1. 문헌 목록 〉17. 17世 〉6. <부정공>학생공휘현홍묘표(學生公諱顯弘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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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정공>장졸재공휘현범행록(藏拙齋公諱顯範行錄)
藏拙齋公諱顯範行錄 余友趙公諱顯範號藏拙齋系出玉川鼻祖諱璋高麗檢校大將軍生諱洪珪官密直生諱佺玉川府院君生諱元吉號農隱封玉川府院君諡忠獻與圃隱鄭先生常友善焉享武夷院生諱瑜文副正以孝著三綱行實我朝以漢城判尹不就克遂不貳之節遯跡于淳昌乾谷里世以虔谷先生稱享順天之謙川院生諱崇文 世宗朝登武科歷事 文宗 端宗兩朝官至節度使景泰乙亥 端宗遜位節度公與子哲山同死於六臣之禍今 上己亥 特旌閭仍爲躋于謙川院寔公十一世祖也七世祖諱信 宣朝四年辛未下 敎錄用丙子諸臣之遺裔者 特除崇仁殿參奉高祖曾祖皆隱德不仕祖諱松年受業寬谷之門早揚文筆之名 英宗己酉中司馬考東彦以文學著於鄕篤於忠孝特書男兒天地忠孝爲大八箇字以垂庭訓妣慶州金氏始振女幽閒貞正有故士女風生公于丙申十月十三日妣孕公有異夢及生氣質淸秀容貌岐嶷至四五歲己知事親之孝遊戱不離親側人多異之及長文才富贍長於詩律屢發鄕解終未大闡不以得失慨於心其事親也左右就養極其誠敬惟以養志爲本未嘗有違忤雖蔬菜之味務盡適口躬自鋤圃兩手腁胝而未嘗有怠慢之志盖感孟子惰其四肢不顧父母之養爲不孝之訓而體之於身者也及遭親喪顔色之慽哭泣之哀見之者莫不流涕前後六年居廬省掃之節祭奠之禮始終如一而拜哭之處草亦不生人以至孝稱之其奉先也節度公父子死節之跡文獻無徵幽隱未彰公爲之痛惜旁探蒐輯至使上達天聰爰被嘉尙之褒而旌其閭享于祠盖其移事親之孝而逮及於先祖也其處兄弟之間友愛尤篤旣湛且樂人無間言處宗族盡睦婣之義處鄕黨盡恭謹之節揚善掩惡不拂人意而人莫不心悅誠服晩好性理之書專事爲己之學沉潜講究見解吋透工夫縝密造詣彌高蔚然爲一方之師表後人之矜式而嘗著江南樂府一卷惜鄕人忠孝節義之泯沒無傳播諸聲韵而欲使闡發又述藏拙集二卷蘊抱經論自發於書詞吟詠之間來學者衆而各隨其材敎導訓誨成就者多人家有變禮則考諸經禮而證正鄕俗有不迷則據乎義理而善誘使一鄕賴而正變家甚貧窶殆有人所難堪而公則處之晏如公無己出取侄爲己後受而養之敎誨有法遂成文行之士克導家規公素無疾病年踰七耋而起居行步無異少壯以一疾不起即庚戌八月十二日也距其生七十三歲矣葬于廣川村後山酉坐光山李氏齊松之女再配延安李氏萬杰女俱未育所後子諱基枰娶長澤高氏顯謙之女有子與女皆幼公天稟和厚氣度洪遠處事明白言論正直任眞而行不事邊幅尤務儉約衣只蔽體食只免飢芬華之念一切不萠於心而於功名富貴淡如也白首窮經手不釋卷咀嚼義理若蒭若豢立心專用力篤事親之孝無愧於古人自修之行有辭於後學世無公道終老巖穴且以出天之孝亦無血續天意人事良可悲矣余於公損弟也恒切嚮仰之懷居地相遠未得源源適寓輝陽距公居不遠自謂從此而有講磨之益公忽長逝此恨何及一日公之子曳衰袖公實蹟示余而請狀草顧余不文不可承當以平日相愛之情義亦有不獲辭者謹據家藏參以所聞見略加撮錄以備立言君子之採擇焉 平陽 朴夏鎭 謹狀 장졸재공휘현범행록(藏拙齋公諱顯範行錄) 나의 친구 趙公顯範의 호는 장졸재요, 관향은 玉川인데 시조 휘 장(璋)은 고려 검교 대장군(高麗檢校大將軍)이요 생휘 홍규(洪珪)는 벼슬이 밀직(密直)이며 생휘 전(佺)은 玉川府院君이요 생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農隱)인데 封玉川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며 포은(圃隱) 鄭先生으로 더불어 항상 착한 벗이 되었고 무이원(武夷院)에 배향(配享)되셨다. 생휘 유(瑜)는 문과부정(文科副正)인데 효행으로 三강행실(三綱行實)에 나타났고 이조(李朝)에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주며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불사 二군의 지절을 지키며 순창금굴리(淳昌金掘里)에 자취를 감추니 세상에서 건곡(虔谷)선생이라 칭하고 순천 겸천원(謙川院)에 향사하였다. 생휘 숭문(崇文)은 세종조(世宗朝)에 무과(武科)에 올라 문종(文宗) 단종(端宗) 두 조정(朝廷)을 차례로 섬기며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는데 경태 을해(景泰乙亥)년에 단종이 대위(大位)를 물러나니 절도공이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六신(臣)의 참화에 순절하여 금상기해(今上己亥)년에 특별히 정포하고 겸천원에 배향하시니 곧 공의 十一세조이시다. 七세조 휘 신(信)은 선조(宣祖) 四년에 병자년에 참혹하게 죽은 여러 신하의 자손을 록용(錄用)하라는 하교(下敎)로 특별히 숭인전(崇仁殿)참봉에 제배(除拜)되셨고 고조 증조는 다 덕을 숨기고 벼슬 않했으며 조(祖) 휘 송년(松年)은 최관곡(崔寬谷)에게 수업하여 일찍 문필(文筆)의 이름을 드날리다가 영종기유(英宗己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셨으며 아버지 휘 동언(東彦)은 문학(文學)으로 유명하고 충성과 효도에 독실하여 남아천지충효위대(男兒天地忠孝爲大)라 八字를 특별히 써서 가훈(家訓)을 남겼다. 어머니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시진(始振)의 따님으로 그윽하고 한가하며 곧고 정직하여 옛날 사녀(士女)의 풍채가 있었는데 병신(丙申)년 十월 三일에 공을 낳으셨다. 어머니가 공을 잉태하여 기이한 몽조(夢兆)가 있더니 나면서 기질이 청수하고 용모가 높게 뛰어나더니 四·五세에 이미 어버이 섬길 효성을 알고 놀고 희롱하려고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으니 경이(驚異)한 사람이 많았고 장성하여는 글재주가 뛰어나 시율(詩律)에 능하므로 자주 향시(鄕試)에 응했으나 마침내 합격치 못하되 득실(得失)을 개의 아니하시었다. 어버이를 섬기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되 오직 뜻을 길러 일찍 어긴일이 없으며 채소라도 구미에 맞게 받들고저 두손에 못이 박히도록 채전(菜田)을 매되 게으른 뜻을 두지 않은 것은 대개 맹자(孟子)님 말씀에 그 사지(四肢)를 게을리하고 부모를 불고한 것이 불효라 하는 훈계를 체득(體得)한 것이다. 어버이 초상을 만나 근심한 안색과 슬픈 울음은 보는자 다같이 눈물을 흘렸으며 전후 六년을 시묘하며 살피고 청소하는 절차와 제사하고 전올린 예가 시종여일하며 절하고 곡한곳에 초목(草木)이 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지극한 효도라 칭도하였다. 선영을 받들며 절도공 부자 사절(死節)의 자취가 고증할 문헌이 없어 그윽하게 숨겨져 밝히지 못함을 슬퍼하여 힘을 다하여 수집(蒐輯)하여 나라에 주달(奏達)하고 이에 포가(褒嘉)를 입어 그 리문을 표하였으며 사우(祠宇)에 배향하였으니 대개 그 어버이 섬긴 효도를 옮겨 선조께 바친 것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심히 도타와 이미 담락(湛樂)하니 사람의 사이 말이 없고 족척(族戚)간에 화목하고 화동한 의리를 다하며 향당에 공근한 절조를 다하고 착한 것을 나타내고 악한 것을 가리며 사람의 뜻을 어기지 않으니 마음으로 복종 아니한 자 없었다. 말년에 성리(性理)학을 좋아하되 몸을 다스린 학문을 힘써 깊히 연구하여 견해(見解)가 투철하고 공부가 높히 진취되어 성대하게 한 고장의 사표(師表)가 되고 후진의 모범이 되니 일찍 강남악부(江南樂府) 一권을 저술하되 고을 사람이 이룩한 충효절의가 민몰(泯沒) 무전함을 애석하여 모든 풍성(聲韻)을 전파하여 개발하고저 함이요, 또 장졸집 二권을 기출하니 싸고 안은 경륜이 스스로 쓰고 짓고 읊은 사이에 열렸으며 배우로 온 많은 수재를 각기 그 재주를 따라 가르치니 성공한자 많았다. 사람의 집에 변례를 쓰면 모든 예서를 고증하여 바로잡고 고을 풍속에 아름답지 못한 사단이 있으면 의리로써 잘 깨우니 고을풍속이 숙정(肅正)되었고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울만치 집이 가난하되 공은 안연이 처신하였으며 공이 기술(己出)이 없어 조카로 후사를 삼고 법도있게 가르쳐 학문과 선행의 선비가 되니 능히 가법을 준수하였다. 공이 평소에 질병이 없어 七十세가 지나도록 기거와 행보가 장년같더니 한번 병환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곧 경술년 八월 十二일이라 향년이 七十三세요 광천뒷산 유좌원에 안장하였다. 초배 光山李氏는 제송(齊松)의 따님이요 재배 延安李氏는 만걸(萬杰)의 따님인데 다 소생이 없고 양자 휘 기평(基梓)이 長澤高氏 현겸(顯謙)의 따님을 취처하여 子女가 있으나 다 어리었다. 공이 타고난 성질이 관후하고 기도가 홍원(洪遠)하며 처사가 명백하고 언론이 정직하여 진실을 행하고 규각을 내지 않으며 검소하여 옷은 다만 몸을 가리고 음식은 다만 요기할 뿐이며 호화한 마음을 一체 먹지않고 부귀와 영화에 담박(淡泊)하시었다. 白首가 되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고 경전(經傳)을 연구하며 의리 탐구(探究)를 진미(珍味)대한것 같이하고 立心用力하고 어버이 섬긴 효행이 옛날사람에 부끄럼이 없으며 스스로 닦은 행의가 후세에 말을 남겼는데 세상에 공도(公道)가 없어 마침내 바위굴에 늙었으며 또 출천지효자로 혈속(血續)이 없으니 하늘 뜻과 사람의 일이 진실로 가히 슬프다. 나는 공의 손제(損弟)라 높이 우러른 생각이 간절하나 사는곳이 서로 멀어 계속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휘양(輝陽)에 우거하니 공의 거처가 불원한지라 이로부터 갈고 닦는데 도움이 되겠다. 스스로 생각했는데 공이 문득 서거하니 이 한을 어찌할고. 一日에 공의 아들이 최복(喪服)소매에 넣은 공의 실적을 내게 보이며 장초(狀草)를 청하는데 내의 우졸한 문식으로 감히 승당할 수 없으나 평일에 서로 사랑하던 정의로 굳이 사양치 못하고 삼가 가장에 의거하고 또 보고 들은 바를 주어모아 기록하여 立言君子의 채택을 바랍니다. 平陽 朴夏鎭 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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